에이엔피의 제17·18회 전환사채는 만기가 2024년 10월 1일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반년 앞선 4월 1일에 두 사채 40억원어치를 사들였고, 다음 날 전부 소각했다. 그 돈은 나흘 전에 발행한 제24회 전환사채로 마련했다. 만기표만 봤다면 10월로 적어 뒀을 현금 수요가 실제로는 4월에 왔다.
두 사채의 조건과 결말
| 항목 | 제17회 | 제18회 |
|---|---|---|
| 공시된 발행일 | 2021-10-01 | 2021-10-01 |
| 계약상 만기일 | 2024-10-01 | 2024-10-01 |
| 표면이자율 | 2.00% | 2.00% |
| 만기이자율 | 5.00% | 5.00% |
| 2023년 말 잔존 액면, 원 | 2,500,000,000 | 1,500,000,000 |
| 실제 만기 전 취득일 | 2024-04-01 | 2024-04-01 |
| 공시된 소각일 | 2024-04-02 | 2024-04-02 |
두 사채에는 조기상환청구권(풋옵션)이 붙어 있었다. 발행 1년 뒤인 2022년 10월 1일부터 3개월마다 사채권자가 돈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이다. 실제 취득일 4월 1일도 이 3개월 주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렇다고 사채권자가 풋옵션을 행사해서 산 건지는 공시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이 사실은 2024년 1분기 보고서의 '보고기간 후 사건' 주석에 나온다. 3월 말 재무상태표에는 사채가 그대로 있지만, 보고서가 나왔을 땐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분기보고서를 볼 때 재무상태표만 보고 넘어가면 이런 사건을 놓친다.
장부에서 사라진 과정
| 장부 변동, 천원 | 제17회 | 제18회 | 합계 |
|---|---|---|---|
| 2024년 기초 장부금액 | 2,411,150 | 1,446,690 | 3,857,840 |
| 당기 이자비용 인식 | 104,811 | 62,887 | 167,698 |
| 상환으로 제거된 장부금액 | 2,515,961 | 1,509,577 | 4,025,538 |
| 2024년 3분기 말 | 0 | 0 | 0 |
3분기 보고서의 부채 변동표다. 기초 장부금액에 이자비용을 더한 금액이 그대로 상환으로 빠지고 잔액이 0이 된다. 공시된 취득·소각과 장부 기록이 정확히 맞물린다.
장부에서 제거된 금액은 40억2,554만원으로 액면 40억원보다 2,554만원 많다. 전환사채 장부금액은 상환할증금이나 이자 인식 때문에 액면과 달라지곤 한다. 실제로 얼마를 주고 샀는지는 결제 자료가 있어야 정확히 안다.
새 빚으로 옛 빚을 갚았다
사모자금 사용내역을 보면 제24회 전환사채가 2024년 3월 28일 50억원 규모로 납입됐고, 그중 40억원이 제17·18회 사채를 사들이는 데 쓰였다. 나머지 10억원은 운영자금이다.
이 사례의 핵심은 여기 있다. 제17·18회가 소각됐다는 공시만 보면 회사 빚이 40억원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나흘 전에 새 전환사채 50억원을 찍었다. 옛 빚을 새 빚으로 갈아탄 것이고, 이 거래만 놓고 보면 전환사채는 오히려 10억원 늘었다. 새 사채에는 또 새 전환가액과 새 풋옵션 일정이 붙는다.
이런 구조 자체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빚이 줄었다기보다 만기와 잠재 주식 물량이 뒤로 밀렸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전환사채를 볼 때
전환사채는 만기일보다 풋옵션 일정이 실제 현금 수요를 더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소각 공시가 나오면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좋다. 자금사용내역 공시에 답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에이엔피처럼 새 전환사채로 마련했다면, 빚이 줄었다기보다 이름표만 바뀐 것이다.
풋옵션 날짜를 미리 적어 두기
전환사채의 조기상환청구권 조건은 발행 때 나오는 '전환사채권 발행결정' 공시와 이후 분기·반기보고서의 사채 주석에 적혀 있다. 보통 "발행일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날부터 매 몇 개월마다"라는 식이다. 에이엔피의 제17·18회는 발행 1년 뒤부터 3개월마다였다. 만기가 3년이어도 실제로는 1년 뒤부터 석 달마다 돈을 돌려 달라는 요구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환사채가 많은 회사를 볼 때는 만기일 옆에 '첫 조기상환 청구 가능일'을 적어 두는 편이 낫다. 그 날짜 이후 주가가 전환가액보다 낮게 머문다면 사채권자는 주식으로 바꾸기보다 돈을 돌려받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때 회사에 현금이 필요해진다.
새 전환사채로 옛 전환사채를 갚는 일이 반복되면 확인할 숫자가 하나 더 생긴다. 새 사채의 전환가액이다. 주가가 떨어진 상태에서 새로 발행하면 전환가액도 낮아지기 쉽고, 나중에 전환될 때 생기는 주식 수가 늘어난다. 빚의 만기는 뒤로 밀렸지만 기존 주주의 지분이 희석될 가능성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제24회의 전환가액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으니 궁금하다면 해당 발행결정 공시를 함께 보면 된다.
이런 회사를 볼 때는 전환사채 발행 이력을 몇 년 치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알 수 있다. 몇 년마다 새 전환사채를 찍어 옛 것을 갚는 패턴이 반복된다면 영업으로 번 돈보다 자본시장에 기대어 굴러가는 회사일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전환사채를 갚은 뒤 다시 찍지 않았다면 본업에서 현금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다. 에이엔피의 경우 제24회가 그 뒤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보면 이 회사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있다.